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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이정열 배우님 [아이다,그날들]



위암 수술과 예능이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 않나요?’

 

지난 43일 방송된 MBC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서 이정열 배우가 위암 투병 고백을 하며 남긴 말이다.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열 배우는 위암 투병 사실을 웃음으로 승화했던 방송 멘트만큼이나 맑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위암을 앓고 있다고 믿겨지지 않는 밝은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한 그는 자신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건강을 잘 챙겨야 할 시기에 세 개의 작품을 연달아 맡은 이유는 <아이다>, <넥스트 투 노멀>, <그날들>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그의 삶을 말해주는 축약판이기 때문이다. 위암 투병 중 그가 선택한 세 개의 작품을 통해 이정열 배우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들어 보았다.


 

 


새로 시작하는 뮤지컬 <그날들>을 홍보하기 위해 출현한 MBC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서 거무튀튀한 얼굴로 등장한 그는 자신의 위암 투병 사실을 알렸다. 예능 프로그램이라 코믹하게 표현 된 그의 투병 사실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마흔이란 나이가 무색한 모습으로 무대를 뛰어 다니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기에 아직도 그의 얘기가 하나의 콩트처럼 느껴졌다. 당사자인 그에게도 현실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가끔 내가 위암 환자 역할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을 해요.”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인식 됐던 예전에 비해 암에 대한 인식은 좋아졌지만 아직도 암에 걸리면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살 수 있죠?’를 가장 먼저 묻는다. 위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심경을 묻자 그는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예상 했는데, 오히려 MBC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서 보여준 유쾌함으로 분위기를 가볍게 전환시켰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어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지?’란 생각이 제일 많이 들었죠. 웃기고 답답하고 한심하고 기분 나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일은 해야지란 생각이 들어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 하루를 보냈어요. ‘나 불치병이래! 에이 썅~ 죽어버려야겠다하고 제 목숨을 스스로 버릴 수 없잖아요? 가끔 위암 환자 연기를 하면 엄청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해요.”

 

아파도 삶은 계속 된다. 절망에 빠져 있는 시간에도 1, 1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어제까지 산 사람과, 오늘까지 산 사람의 경험에는 24시간의 차이가 난다. 암 선고에 허망해 있는 순간에도 삶은 계속 지속 되고, 먹고 사는 문제도 계속 된다. 작품을 쉬면 돈이 생기지 않고, 가정불화가 생기니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 멈춰 서지 않고 오늘을 살아간다고 너스레를 떨며 호탕하게 웃는 그의 1, 1분은 오늘도 유쾌하게 지나가고 있다.

 


 1996년 가수로 먼저 데뷔한 그가 처음 연기를 시작한 작품은, <지하철 1호선> 초연을 성공적으로 끝낸 학전이 10년간 준비한 창작 뮤지컬 <개똥이>였다. 그 뒤로 가수의 경험을 살려 <행진! 와이키키 브라더스>, <하드락 카페>등을 했지만,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이었을 뿐 자신이 진짜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배우 이정열이란 호칭이 아직 낯간지러웠던 시절, 그에게 진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안겨준 작품은 <아이다>였다.

 

<아이다>가 국내에 처음으로 올라왔던 2006년 초연 배우로 알려진 그의 <아이다> 입성기는 꽤나 파란만장했다. <아이다>에 커버 캐스트로 캐스팅 된 그는 8개월 동안 무대에 서보지 못했다. 백스테이지에서 오늘은 무대에 설까, 내일은 무대에 설까, 초조한 기다림을 보내다가 서울 공연이 끝났다.곧바로 성남 오디션을 보고 2차 콜백을 받았지만 이번엔 운이 따라주지 못했다. 오디션을 보는 날이 가족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고, 오디션을 보자마자 공항으로 달려가는 바람에 2차 콜백 공지를 보지 못한 것이다.

 

당시엔 아쉬웠지만 운명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때 운 좋게 캐스팅 됐다면 가족과 좋은 시간도 갖지 못하고, 다른 작품을 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 뒤에도 그의 도전은 계속 되었다. 커다란 쇠를 마음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깎으며 계속해서 자신의 준비된 모습을 보여줬고,

드디어 예리하게 연마 된 칼이 검집 밖으로 나올 기회가 주어졌다.

 

아이다 초연 전까지는 뮤지컬 배우라는 말이 어색했어요. 닭살스럽고, 내 것이 아닌 것 같고. 그때까진 가수 이정열, 음악 하는 놈 이정열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아이다의 초연 멤버로 작품 활동을 한 이후론 스스로 작품을 찾아다니며 오디션을 보러 다녔는데 어느 순간 가수 이정열이 아닌 배우 이정열이 되어 있더라구요. 제가 배우라는 직업으로 먹게 살게 될 줄 꿈에도 몰랐어요.”


 

노래 좀 하지마라. 연기도 하지마라.”

 

그가 막 연기를 시작했을 때, 그에게 배우의 길을 열어준 학전의 김민기 대표가 자주하던 말이다. 20대 중반의 그에게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꾸지람이었다. 악보대로 노래하기 위해, 시키는 대로 연기하기 위해 와 있는 자신에게 노래를 하지도, 연기를 하지도 말라고 하다니. ‘이러다가 미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문을 알 수 없는 꾸지람이었지만, 나이를 먹자 그 뜻이 어렴풋하게 다가왔다. <넥스투 투 노멀>의 댄역을 하며 그 의미는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맡은 역할의 옷을 입고 움직이면 되는데, 맡은 역할의 옷을 입고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했던 거예요.”

 

, 이곳은 카페고 우리는 손님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할 일은 주문을 하고 음료를 받은 뒤 자리에 앉아 마시는 것이다. 매우 간단명료한 일이지만, 만약 여기에서 우리가 이 카페의 손님처럼 보여야지!’하고 남들에게 보일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게 된다면 매우 부자연스럽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마치 연기를 하는 것처럼.배우가 연기를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은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다. 관객들이 보고 있는 무대가 현실이고,실제 상황인 것처럼 행동하며 관객을 속이는 것. 그것이 연기를 잘하는 좋은 배우의 비밀이다. 거짓말을 잘하는 배우일수록 관객들에겐 좋은 배우로 보인다.

 

그전까지는 늘 무언가를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넥스트 투 노멀>에서 댄은 상처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가족들 앞에서는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아요. 내가 너희를 위해 이렇게 얘를 쓰고 있어라는 티를 내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서 있어요. 자신의 상처를 보이지 않아야, 상대방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의지하니까요. 그것처럼 무대에선 자연스럽게 있는 것이 중요해요. 내가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도록. 007 제인스 본드가 되는 거죠.”

 

이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좀 더 빠르게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었을 텐데하고 그는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연의 섭리는 이 모든 것을 나이가 든 후에 깨닫게 한다. 분명 어른들을 통해 지금 얻은 깨달음을 들었었지만, 어릴 때는 그 말의 뜻을 도저히 이해하질 못한다. 하지만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나이를 먹어야만 누릴 수 있는 이 지혜의 혜택 때문에 우리는 늙음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니까.

 

 


김광석 가수의 노래를 모아 만든 쥬크박스 뮤지컬인 <그날들>의 캐스팅 제의를 받은 것은, 위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덜컥 들은 늦가을이었다. 그 당시 그는 암수술을 받고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힘겨운 항암제 치료를 받으며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일이 막막했던 그에게 <그날들>은 높고 높은 산처럼 보였다. 자신이 과연 퇴원 후 예전처럼 무대 위에 설 수 있을까? 다시 뮤지컬 배우로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이 없어진 그는 <그날들>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날들>에 녹아 있는 과거의 추억이 그를 다시 뮤지컬 배우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거 내가 한다.’

 

아직 음악 하는 놈이었던 이정열이 음악을 한다며 대학로를 뛰어다니던 시절, 그아 함께 단칸방에서 뒹굴거리며 10년 뒤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던 형이 <그날들> 공동제작자 대표가 되어 그에게 건넨 말이다.

 

함께 음악을 하던 형들이 치킨을 먹으며 야 왜 핫소스는 안 사왔니?’라고 말하면 번개 같이 뛰어가서 핫소스를 사왔던 10년 전의 그날. 10년 후 핫소스를 사다 나르던 막내는 뮤지컬 배우가 되었고, ‘10년 후에 우리는 무얼 하고 있을까?’하고 묻던 새끼 매니저는 대표가 되어 다시 재회했다.

 

내가 필요해?”

그래, 필요하다.’

그래 하자. 할게!”

 

대뜸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은 그는 일말의 고민 없이 호기롭게 외쳤다. 눈앞을 뿌옇게 만들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두려움이 그 순간만큼은 명확하게 걷히는 느낌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호기로 가득 찼던 10년 전의 그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날이라는 노래 자체는 김광석 형님의 히트곡은 아니에요. 하지만 임팩트가 센 곡이었고, 그 곡을 형이 돌아가시고 나서, 콘서트 때 항상 제가 그 곡을 불렀어요. 제가 음악을 하면서 나의 롤모델로 삼았던 분, 그리고 정말 말도 안 되는 나이에 말도 안 되는 일로 목숨을 버린 사람. 근데 아직까지도 전화하면 전화를 받을 것만 같은 그 사람이 부른 노래로 뮤지컬을 만든다는데 참여를 안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날들>에서 그가 맡은 역은 청와대 주방장 운영관이다. 40대에서 50대 혹은 30에서 50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주연 배우들을 돋보이게 해주는 감초역할이었다. 멋있지 않는 역할이었지만 오히려 그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도 자신이 이곳에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들>은 김광석이 부른 노래로 만들었지만, 김광석이 없어요.”

 

<그날들>의 매력을 묻는 질문에서 그는 김광석스럽지 않아서 좋다고 말했다. 뮤지컬 <맘마미아>를 본 국내 관객들 중에는 뮤지컬 넘버로 쓰인 곡들이 미국의 유명한 팝가수의 노래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맘마미아>에 쓰인 팝가수 아바의 노래들이 뮤지컬 넘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스토리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작품 안의 노래로 인식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날들>의 뮤지컬 넘버도 김광석을 추억하길 강요하지 않는다.

 

뒤통수를 뻥~ 차주는 작품이에요.”

 

우리나라 관객들은 주크박스 뮤지컬을 좋아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이야기를 좋아한 민족이라서 노래로 이루어진 송스루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는 문화평론가의 의견이 있지만, 이정열 배우는 이에 대해 당연한 거예요. 안 좋은 주크박스만 봐왔으니까요라고 말한다.

 

어떤 노래가 쓰여 졌는지를 알게 되면 스토리로 어떻게 흘러갈지 알게 돼요. 그래서 재미가 없어지죠.”

 

그의 말대로다. <맘마미아>가 주목을 받았던 것도 에바의 노래들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으면서 노래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파격적인 스토리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날들>은 관객들의 예상을 시원하게 깨트린다. 누가 김광석의 노래들로 청와대 이야기를 쓸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날들>을 통해 살짝 엿보여질 그의 과거, 가수 이정열의 모습이 기대된다.

 



연기 노선이라는 말은 누가 만든 거죠?”

 

노래라는 말은 옳지 않아요. 노래는 가수가 부르는 거예요. 대사죠. , 음이 있는 대사인 거예요. 배우는 노래를 부르지 않아요. 배우는 연기를 하고 행동을 하고 말을 해요.”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지적한 말들이다. 편의상 별 생각 없이 쓰는 연기노선’, ‘노래같은 단어들의 잘못 된 사용을 말하며 배우로써의 진지함을 보여준 그는 TV나 인터뷰에서 보여준 호탕하고 유쾌한 이미지와 다르게 진지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신념과 옳고 그름이 정확하고 배우로써의 자부심이 투철한 사람. 그리고 관객을 탓하지 않는, 낮은 배우의 자세를 아는 사람이었다.

 

늘 말하지만 관객은 죄가 없어요. 배우가 문제인 거예요. 혹은 배우의 외적인 면을 가지고 장사를 하려는 장사꾼들이 문제인 거지 관객은 죄가 없어요.”

 

뮤지컬이 대중화 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그는 단호히 말한다. 뮤지컬 관계자들은 관객들이 원하기 때문에 화려한 스타 캐스팅을 한다고 말하지만, 작품에 대한 정보보다는, 어떤 배우가 캐스팅 되었다는 홍보가 더욱 이슈가 되고, 관객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가 하는 작품만 보는 이 모든 상황들을 만들어 낸 것은 관객들이 아니라고.

 

모든 시장 유통의 문제점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같은 말을 해주는 배우가 있다는 것이 참 멋지지 않은가?

<아이다>, <넥스투노멀>, <그날들>을 통해 그가 보여줄 배우로써의 책임감이 기대된다.



글 / 오윤희

뮤지컬 퍼블릭 www.musicalpubli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