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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최용석 프로듀서 [두도시이야기]





국내에서 <크리스마스 캐럴> 작가로 알려져 있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라인업 소식이 들려올 무렵, 관객들의 이목이 집중 된 곳은 ‘어떤 배우가 캐스팅 되었나’보다 ‘어떤 제작사가 만드느냐’였다. 갑자기 우후숙준으로 생겨난 제작사의 지나치게 상업적인 작품들로 인해 관객들의 기대치가 낮아져 있던 시기였다. 탄탄한 제작사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비오엠 코리아는 낯설 불안으로 다가왔지만 안목 있는 대작들에 참여한 이력이 퍼지며 금세 신뢰도가 올라갔다. 그리고 2011년. 신성 회사나 다름없었던 비오엠 코리아는 군더더기 없는 완성도로 <두 도시 이야기>를 올렸고, 단번에 실력 있는 제작사로 떠올랐다.


작년에 좋은 반응을 얻은 <두 도시 이야기>의 재연과 더불어 <헤이, 자나>, <친구>의 개막을 준비하고 있는 비오엠 코리아의 최용석 대표를 만났다.





해맑은 웃음과 캐주얼하면서 지적인 동그란 안경, 단정한 와이셔츠, 딱딱함을 부마시켜 주는 스카프.  

 

최용석 대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넥타이 대신 스카프를 두른 프로필 사진들이 많아서 정장을 캐주얼하게 입는 타입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와이셔츠를 즐겨 입어서 정장을 캐주얼하게 변형 시킨 것이 아니라, 청바지와 티셔츠를 좋아해서 정장을 캐주얼하게 입은 것이었다. 청바지와 티셔츠를 즐겨 입고 오히려 정장을 불편해하는 타입이지만, 한 제작사의 대표라는 직함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할 장소들이 있고, 최대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정장스럽게 입으려고 노력하다보니 고급스러움과 세련미가 느껴지는 최용석 대표의 캐주얼한 정장 룩이 탄생한 것이다.


극장에 나타날 때마다 캐주얼한 정장을 입고 있어서 평소에도 정장을 즐겨 입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가 극장을 방문 할 때는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이 아닌 작품을 올린 제작사의 대표로써 작품을 모니터링하기 위해서다. 제작사 대표로써 여러 가지 부분을 체크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니 정장에 가까운 옷을 입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오해를 받는 것은 다른 제작사 대표들에 비해 극장을 방문하는 횟수가 잦아 관객들에게 자주 목격되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삼겹살집 가면서 양복을 입고 가면 냄새 나잖아요. 부자연스럽고, 과해 보이고. 오늘 저녁에 삼겹살을 먹는다고 생각을 하면 빨기 쉬운 옷을 입고 나가는 게 좋은 거고,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거기에 맞는 옷을 입는 게 좋죠. 공연도 어떤 공연인가에 따라서 옷차림이 조금씩 달라져요. 영화나 공연을 보러 갈 땐 편하게 입어도 되지만 오페라를 보러 갈 땐 반바지나 슬리퍼를 신고 갈 수 없잖아요.”


그의 말대로 각 장소에는 그 장소에 어울리는 기본적인 옷차림이 있다. 오늘 인터뷰에서 평소의 캐주얼 정장룩을 벗고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이유도 자기 자신에 대해 좀 더 진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비오엠 코라아의 대표로써 멋지게 꾸미고 나올 수도 있었지만 가벼운 옷차림을 통해 일반인으로 구성된 뮤지컬 퍼블릭팀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인터뷰 내내 그가 보여준 유쾌함은 인터뷰 분위기를 유연하게 만들었다. 옷차림으로 예의를 표현하는 자신만의 풍류를 지는 그는 평소에 즐겨 입는 청바지와 티셔츠처럼 상대방을 편안하고 유쾌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두 도시 이야기>가 사랑을 받았다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Yes이자 No에요.” 

 

<두 도시 이야기>의 재공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작년의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좋게 말하면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돈이 된 작품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최용석 대표는 Yes와 No를 동시에 답했다. <두 도시 이야기>가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것은 맞지만, 대중들 보다는 뮤지컬을 원래 소비하는 정지적인 소비 계층인 마니아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다시 올리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로 예를 들어 보면 대중들이 기억하기에 인상적이고 재밌었지만, 실제론 흥행이 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있는 것과 같아요.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말하는 작품들이 꼭 흥행하고 돈을 많이 벌었냐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거죠. 뮤지컬도 마찬가지예요. 수입으로만 본다면 <두 도시 이야기>는 동일한 기간에 했던 다른 뮤지컬들에 비해서 잘 된 편은 아니었어요. 작년에 잘 됐으니까 올해도 또 한다는 개념은 아닌 거죠. 내가 참 좋아하는 작품이고 잘 만들고 싶은 작품이어서 최선을 다해서 했고, ‘올해 다시 올리면 작년보다 더 잘할 수 있다!’라는 마음이 들어서 다시 한 번 올리게 되었죠.” 

 

<두 도시 이야기>의 초연을 올릴 때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고의 베스트를 만들었지만, 분명 자신이 보지 못한 부족한 부분들이 있었고, 그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고 싶어서 재공연을 올린 것이다. <두 도시 이야기>의 시작에 대해 그는 자신의 작은 욕심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말한 자신의 욕심이 조금 더 좋은 작품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사람의 욕심이기도 하다. 좀 더 좋은 것을 원하는 사람들의 욕심이 모여서 세상은 좀 더 편하고 풍족하게 변하는 것이니까.


“휴대폰, 자동차 등의 제품이 나올 때 그들이 광고하고 홍보하는 기사를 보면 ‘더 이상의 것은 없다’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항상 보면 더 좋은 것들이 나와요. 뮤지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스토리나 음악에 대해서 큰 변화는 가질 순 없지만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모습을 갖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어요. 같은 공연을 해도 어떨 땐 파워풀하고, 어떨 땐 조금 힘이 없는 것처럼요. 그런 것들에 대한 완성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2013년의 시작이에요.”






<두 도시 이야기>를 국내에 올렸을 때 관객들이 비오엠 코리아에 주목한 이유는 <두 도시 이야기>라는 작품을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이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이 작품을 잘 올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도 공연 자체만으로 이 복잡한 이야기를 이해하고 즐길 수 있을까 등을 고민한 흔적이 공연 곳곳에 보였고, 제작사의 자부심을 엿보았다. 오랫동안 뮤지컬을 좋아한 사람일 것 같다는 추측이 들었지만, 최용석 대표가 뮤지컬을 시작하게 된 것은 의외로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17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학창 시절을 외국에서 보낸 그가 ‘기획’의 시초가 될 만한 일을 한 것은 대학교 졸업 시즌에 학교에서 준비했던 패션쇼의 기획을 한 일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한인들이 하는 기독교 라디오 방송을 하게 되었고, 동부지역 최초의 AM방송국이 생겨서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 라디오 방송을 했었다는 경력 빼고는 방송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고,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데 무얼 믿고 쓰냐는 물음에 청소라도 하겠다고 대답했다. 남들이 퇴근한 시간에 책상을 닦으며 열심히 청소를 하며 방송에 대해 하나씩 배워나간 끝에 제작피디가 되고, 선발피디로 뽑혀 프로그램을 하며 여러 가지 사업들을 했었다. 방송국에서 그를 움직였던 원동력은 이 일을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조금씩 해나갔다.


어느 날 방송국에서 어떤 공연을 주최하게 되었고 사전답사를 위해 공연장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맡았던 공기에 대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냄새가 났다’라고 회상했다. 그 동안 그는 방송국과 스튜디어의 공기가 세상에서 맛있는 냄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계속 방송 일을 했었고, 그곳보다 더 맛있는 공기를 발견하게 되어 공연을 하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방송에 대해 몰랐지만 청소부터 시작하며 도전했던 것처럼, 그때까지 벌어온 돈을 긁어모아 브로드웨이라 불리는 뉴욕 42번가에 무작정 덜컥 사무실을 냈다. 서울에 사는 지인들에게 공연을 하고 싶다는 애기를 하며 자신의 꿈을 주위에 알리고 구체화 시키는 것에 3~4년을 보냈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이것을 하고 싶다는 젊은 열망은 확실하고 명확했다. 



 

 


뉴욕 42번가에 무작정 사무실을 낸 그는 서울에 사는 지인들에게 공연을 하고 싶다는 자기PR을 하며 4년을 보냈다. 뮤지컬의 거리에 회사를 세웠으니 많은 브로드웨이 작품을 작은 것에서부터 조금씩 시작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오히려 지극히 한국적인 작품을 했었다.


카네기 홀에서 살풀이 공연하고, 뉴욕대학교 앞 광장에서 스트릿 퍼포먼스를 주최했다. 한국의 연극과 뮤지컬을 가져와 올리고 한국의 여러 가지 전통예술과 현대무용까지 올렸다. 특별히 한국의 여러 가지 예술에 대해 조예가 깊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좋았던 일들을 찾아했던 것처럼 좋아서, 이 일을 해 보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다.  

 

“내가 미국에 살면서 한국 사람으로서 공연을 하는데 뭘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했었는데, 스물 몇 살이었던 어렸을 때라, 착각을 한 거였죠. 제가 문화관광부에서 파견 나온 사람인 줄 알았던 거죠, 스스로. 혼자 이상한 사명감에 사로 잡혀서 그런 것들을 겁 없이 했었어요. 진짜 겁이 없었기 때문에 했었던 것 같아요.” 

 

스물 몇 살의 젊은 나이에 겁 없이 덜컥 사무실을 내놓고 시작한 그의 사업은 꿈 그 자체였다. 아직 세상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고, 사업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랐던 나이였기에 꿈만을 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의 공연 끝에 그는 사업이 꿈만으로는 원활히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 공연마다 열심히 일했고, 소위 말하는 대박을 쳤지만 빚은 자꾸만 들어났다. 쌓여 가는 빚을 보며 사업에는 이것을 하고 싶다는 꿈과 열망 이외에 다른 자본적인 것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에이전시 회사로 사업의 방향을 틀게 되었다. 

 

“그 일을 하며 저는 굉장히 즐거웠어요. 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죠. 그 결과를 보며 내 주변 사람들한테 패를 끼치지 말자고 다짐을 했어요. 돈은 내가 쓰지 말고, 돈을 벌면서 일을 하자고 마인드를 바꾼 거죠.” 

 

사업의 부채로 인해 돈의 무게와 책임감 등을 깨달은 그는 공연을 올리면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 할 수 있는 동시에 사업가로서의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것을 찾은 결과 브로드웨이의 작품을 한국 제작사에게 소개해 주고, 공연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에이전트 일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직접 공연을 올리진 않았지만 그 과정을 도와주며 충분히 자신이 공연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꼈다.  

 

“10년이 조금 지났을 때였어요. 어느 순간 이일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이 싫다고 느껴졌어요.” 

 

사업의 목적인 수익성을 올리면서 꿈도 어느 정도 실현 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10년이 지나자 에이전시 일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여전히 공연은 좋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냄새였지만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사무실이 조금씩 커져 에이전시 회사가 되고 물질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꿈에 대한 미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꿈을 달래기 위해 자신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작품에 대한 그림을 무대에서 그대로 그려줄 제작사들을 찾으며 조금 건방지게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꿈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질 뿐 채워지지 않았다. 자신과 취향이 잘 맞았던 한국의 제작사 오디 컴퍼니와 신시 컴퍼니를 주 고객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이었던 <드림걸즈>, <맨오브라만차>, <스팸얼랏>, <스토리오브마이라이프>, <컴퍼니>, <나인>의 매니저먼트를 하며 몇 년을 더 버티던 그는 결국 자신이 직접 공연을 올리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가 비오엠 코리아를 세웠다. 마흔이라는 나이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2년 동안 많은 고민을 했지만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평생 에이전트 회사를 운영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었던 그는 카네기홀에서 살풀이 공연을 했었던 스무살의 열정을 끄집어내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에 도전장을 걸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그에게 한국의 뮤지컬 시스템이나 한국관객들의 기호를 파악하는 일은 꽤나 어려웠을 것이다. 그 어려움에 대해서 묻자 그는 구구절절한 하소연이 아닌 명쾌한 대답을 내 놓았다. ‘저는 그런 거에 관여하지 않아요.’ 

 

<두 도시 이야기>를 올리면서 그는 이 작품이 한국관객들의 정서에 잘 맞아 대박을 터트릴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에이전트 경험으로 쌓아온 직관, 연륜을 통해 <두 도시 이야기>가 참 좋은 작품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그 좋은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공연 기획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에이전트였을 때는 작품의 장점과 단점, 제작을 할 때 주의점 등을 계산하며 작품소개를 했었지만, 자신이 작품을 만들 때는 그런 계산이 들어가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작품을 소개 할 때는 그 작품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줄 의무가 있지만, 자신이 제작자 일 때는 그 작품이 좋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스스로를 설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제작을 도와줄 투자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이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일 뿐이었다. 

 

“작품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관객들에게 일일이 ‘어떤 배우를 쓸까요? 어떤 극장에서 할까요? 어떻게 만들까요?’ 물어 볼 수 없잖아요. 일부분에 대해서는 피드백을 구할 수 있지만 결국 그것을 수용할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프로듀서 자신이에요.” 

 

프로듀서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작품을 만드는 길이 있다. 총책임자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것을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려고 노력하지만, 최종 결정권을 쥔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주관대로 판단해서 일을 진행 시킬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판단과 주관을 믿으며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최선을 다해 올린다. 모든 작품이 다 잘 되고 성공 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오랜 에이전트 경험으로 알고 있고, 실패하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한다면 실패에 대한 후회를 어느 정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듀서는 자기 자신을 믿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고독한 위치의 자리다. 그 고독함을 아는 그는 자신의 해안과 직관을 믿고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최선을 다해 올린다. 한국 관객들이 이 작품을 재밌게 즐길 수 있도록 작품을 다듬고, 작품을 잘 소화해 낼 수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며 노력을 기울이다보면 그 노력들이 쌓여 관객들의 취향과 요구, 한국 뮤지컬 시장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날을 위해 그는 오늘도 스스로를 믿으며 좋은 공연을 만들기 위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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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편집 오윤희,배예두레 thtjftptk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