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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보.잡 넘버

듣고, 보고, 잡고 싶은 뮤지컬 넘버 - 피맛골 연가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남녀 간의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소재야 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크게 사랑받는 소재일 것이다. 이번 듣.보.잡 넘버는 실제 존재했던 종로 피맛골을 배경으로, ‘김생’과 ‘홍랑’이라는 상상의 인물을 더해 두 남녀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뮤지컬 ‘피맛골 연가’를 다뤄보고자 한다.

 

 



  뮤지컬 피맛골 연가는 서울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한다는 계획 하에 서울시와 세종문화회관이 기획하고 준비해 2010년 초연된 작품이다. 2011년 <더뮤지컬어워즈>에서 3개 부문을 수상(음향상/작곡작사상/조명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특히 <열하일기만보>,<하얀앵두>등을 집필한 배삼식 작가와 <형제는 용감했다>,<싱글즈>,<그날들>로 우리에게 친숙한 장소영 음악감독이 각각 작사와 작곡에 참여하면서 힘을 실어준 작품이다.

 

 

1. 한 천년

 

 

어두운 조명. 공허한 듯 텅 빈 무대에 밑동만 남은 살구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이윽고 살구나무의 정령인 ‘행매’의 노래가 이어진다.

 

"한 천년 서 있어보니 알겠대

  동강난 몸뚱이 둥치만 남아두
  한 천년 기다려보니 알겠대
  꽃피던 시절이야 아득해두
  가고 도 오고 또 가는 일
  아주 떠나는 것은 없더라
  아주 떠나는 것은 없더라"

 

  극을 열고 닫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행매는 오랜 세월 같은 자리에서 피맛골을 지켜왔음에도 재개발과 철거로 인해 당장 내일이면 뿌리째 뽑혀 사라질 신세가 된다.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라도 하는 듯이 관조하는 것 같은 읊조림으로 ‘김생’과 ‘홍랑’의 이야기를 회상한다. 세상은 변하고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그것이 아주 떠나는 끝이 아니라며 이승과 저승을 초월하는 존재인 행매가 노래하는 ‘한 천년’은 한 곡 안에 피맛골 연가를 잘 응축해 놓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또한, 실제 지명을 사용함으로써 조선시대, 근대 그리고 현대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장점이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곡이기도 하다.

 

 

02. 푸른 학은 구름 속에 우는데

 

 

"열린 듯 닫힌 듯 돌고 도는 길

눈 뜨면 언제나 막다른 골목
  누가 나를 던져 놓았나
  거미줄 같은 미로

  여기로 저기로 돌고 돌아도
  눈 뜨면 언제나 막다른 골목
  누가 나를 버려 두었나
  들어온 곳 있으나 나갈 길 없네"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서출이라는 신분의 벽에 가로막힌 김생. 살구나무를 베려고 하는 홍랑의 오빠 홍생과 대립상황에서 홍생의 오만함을 참지 못하고 대리시험 본 것을 발설해 홍생의 분노를 사게 되고 광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선비를 상징하는 ‘학’이 청운의 푸른 꿈을 펼치지 못하고 구름 속에 갇혀 울고만 있음을 빗대어, 곧 죽게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운명과 서출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꿈을 꿀 수도 없는 늘 똑같은 암담한 현실임을 한탄하고 좌절하는 김생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곡이다.

 

 

03. 당신에게로 + 인연

"(인연) 인연은 깨어져 산산이 흩어져
모든 약속 흩어져 어디로 가나

 

(당신에게로) 원삼 저고리 열두 폭 치마 떨리는 족두리 수줍은 연지도
모두 당신만을 위한 것 머리부터 발끝까지
춤추는 새들과 함께 만발한 꽃들과 함께
나 지금 당신에게 가고 있어요 기다리는 당신 곁으로
얼마나 반가울까 우리 다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다시 만나면
우리 다시 만나면 헤어지지 말아요 "

 

  겨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지만 홍랑이 김생을 숨겨준 것이 발각되어 김생은 홍생에 의해 수장될 위기에 처하고, 홍랑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처지에 놓인다.


  결국 신분과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깨지고 흩어졌다고 부르는 행매의 노래 ‘인연’에 이어 바로 홍랑의 넘버인 ‘당신에게로’가 흘러나온다. 두 곡 모두 ‘사랑의 단절’이라는 상황 아래에 맥을 같이 하면서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다음 생을 기약할 만큼 서로에게 절대적인 존재임을 나타내는 ‘당신에게로’가 인연이 흩어져 어디로 갈지조차 알 수 없다하는 ‘인연’과 대비된다. 곡 후반부에는 두 곡이 한 곡으로 줄기가 모아져 두 사람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심화시킨다.


  또한, 앙상블, 행매, 홍랑, 김생이 곡 안에서 한데 어우러짐과 더불어 피맛골 연가가 표방한 해금, 피리, 가야금 등 국악을 가미한 퓨전오케스트라 형태가 주는 맛을 크게 느낄 수 있는 곡일 뿐 아니라 극 후반부 줄거리의 큰 틀이 될 홍랑의 자결과 김생이 중천에 머물게 되는 이야기가 이 곡에 큰 뿌리를 내리고 있다.

 

 

04. 아침은 오지 않으리

 

 

  김생이 죽었다 생각하고 자결한 홍랑은 혼령이 되어 구천을 떠돌고, 극적으로 목숨을 건져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천에 머물게 된 김생이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두 사람의 안타까운 사랑이 절정에 달했을 때 두 사람이 함께 ‘아침은 오지 않으리’를 부른다.

 

  2막부터 등장하는 쥐떼가 견우와 직녀의 오작교처럼 두 사람을 위해 공간을 초월한 찰나와 같은 만남을 성사시키는데, 이 넘버에서는 동이 트기 전 까지 만이라는 ‘시한부’적 만남 속에서 드디어 재회한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감격과 함께 동이 트면 또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될 안타까움이 혼재한다.

 

"어둠 속에서 등불이 흔들리네 바람도 없이
창문 밖에서 꽃들이 떨고 있네 바람도 없이
아득한 피리소리, 이 짧은 밤
허공에 떠도네, 이 짧은 밤
잠시 흔들리다, 잠시 떨리다가 우리는 떠나가네

아침이 오면 사위는 등불처럼 너는 가는가
아침이 오면 지는 저 꽃잎처럼 아주 가는가
매운 재만 남기고, 이 짧은 밤
향기만 남기고, 이 짧은 밤
잠시 흔들리다, 잠시 떨리다가 너는 가는가"

 

  특히, 홍랑이 어둠속에서 떨고 있는 등불, 창문 밖에서 바람도 없이 떨고 있는 꽃잎을 노래하면 김생이 대구를 이루듯 아침이면 사위는 등불, 아침이면 지는 꽃잎이라고 표현하며 잠시 떨리고 잠시 흔들리다 다시 떠나갈 자신들의 상황을 표현한다. 이처럼 웅장한 오케스트라 선율에 시조와도 같은 아름다운 가사가 어우러져 피맛골연가 넘버 중 관객들에게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곡이다.


  좋은 뮤지컬 넘버를 손꼽을 때마다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뮤지컬 ‘피맛골 연가’의 넘버들. 2011년 공연을 끝으로 여러 가지 제약에 막혀, 현재까지 뚜렷한 재공연의 불씨가 보이지 않아 많은 관객들에게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부디 올해는 ‘피맛골 연가’의 재공연 소식을 접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 뮤지컬 넘버 ]

 

당신에게로 + 인연

 


아침은 오지 않으리

 

 


글. 이하나 기자 (tn5835@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