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관람을 부르는 뮤지컬의 흥행 코드가 있다. 바로 ‘힐링’이다. 나의 상황과 감성에 맞는 음악을 발견하면 몇 번이고 다시 듣는 것처럼, 고된 일상에 지쳐있던 관객이 작품을 통해 ‘힐링’을 경험하면 위로를 얻고 싶을 순간 다시 극을 찾게 되는 것이다. 배우와 관객 모두 ‘힐링 뮤지컬’이라고 손꼽아 추천하는 뮤지컬이 있다. 바로 창작 뮤지컬 <빨래>이다. 녹록치 않은 서울 살이를 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나의 직장생활, 자취생활, 서울 살이를 공유하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이 작품은 2005년 초연 이후 9년간 35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얼마 전 15차 공연에 돌입했다.
▶ 추민주 작/연출가, 민찬홍 작곡가 콤비의 작품
뮤지컬 <빨래>는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공연으로 첫 선을 보였다. 연극 <나쁜 자석>, <클로저>등을 연출하고, 뮤지컬 <젊음의 행진>, 연극 <그자식 사랑했네> 등의 대본을 쓴 추민주 작/연출가와 뮤지컬 <잃어버린 얼굴 1895>, <넌 가끔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 딴 생각을 해> 등을 작곡한 민찬홍 작곡가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2003년, 졸업 작품을 올리고 군대에 갔던 민찬홍 작곡가의 공백으로 2006년 공연에는 다른 작곡가가 참여했지만, 2007년 재공연부터 민찬홍 작곡가의 곡으로 전 넘버를 통일하며 지금의 <빨래>가 완성 되었다.
탄탄한 대본과 음악으로 무장한 이 작품은 2005년 제11회 한국뮤지컬대상 작사/극본상, 2008년 SFCC Awards 외신기자상, 2010년 제4회 더 뮤지컬 어워즈 극본상, 작사/작곡상을 수상했으며 고등학교 문학(창비출판사), 중학교 국어(대교출판사) 교과서 수록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012년에는 일본 라이선스 공연으로 진출하며 우리의 창작뮤지컬이 해외에서 라이센스 공연이 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뮤지컬 <빨래>를 통해 달동네 옥탑방과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선보인 추민주-민찬홍 콤비는 고독사와 1인가구를 소재로 2013년 CJ 크리에이티브 마인즈를 통해 뮤지컬 ‘어차피 혼자’의 리딩공연을 선보이며 호평을 받기도 했다.
▶ 판타지가 아닌 현실, 누군가의 일기장 같은 공연
뮤지컬 <빨래>의 배경은 서울, 그 중에서도 하늘과 맞닿은 작은 동네이다. 27살의 나영은 고향인 강릉을 떠나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다. 서울 살이 5년 만에 6번째 이사를 하며 마주친 몽골 청년 솔롱고, 반 지하 방의 주인 할머니, 옆집에 사는 희정 엄마와 구씨 등을 만나 서로의 힘겨운 서울 살이를 공유하는 그들을 보고 있자면 드라마 속 신데렐라가 아닌 내 친구, 내 이웃의 일기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뮤지컬 <빨래>에서 나영이를 옥상에서 처음 발견하고 젖어있는 빨래를 걸쳐 입는 솔롱고, 아픈 딸을 위해 기저귀를 빠는 주인 할머니, 서점에서 일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는 나영이의 에피소드들은 추민주 작/연출가의 경험담을 토대로 만들어 진 장면이다. 뮤지컬 <빨래>의 탄탄한 드라마는 작가의 경험담을 녹여 낸 작은 디테일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뮤지컬 빨래의 매력
1. 현실적인 공감, 깊이 있는 가사
뮤지컬 <빨래> 속 주인공은 지나간 1980-90년대가 아닌 2000년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초연 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들은 2003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2014년까지 함께 흘러왔다. ‘현재’인 배경에 맞춰 ‘서울 살이 몇 핸가요’ 넘버 중 언급되는 최저임금과 보증금, 월세를 시대에 반영한 금액으로 수정하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2003년 4만원이었던 최저임금은 현재 90만 원 대로 수정한 가사로 들을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뮤지컬 <빨래>의 공감과 감동은 넘버들은 가사에 집중하면 할수록 더 깊어진다.
나의 꿈을 어느 방에 두고 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나영이와, 힘들게 살아가는 건 우리에게 남아있는 부질없는 희망 때문이라는 솔롱고의 목소리는 매일을 살아내면서 잊혀지고 잃어버린 나의 꿈을 떠올리게 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내가 버티고 있는 이유를 공감하게 한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니’라고 외치는 나영이의 울음은 귓가에 오래토록 남아있을 것이다.
2. 우울할 수 있는 이야기를 밝게 만들어 낸 완급 조절
달동네 옥탑 방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 반 지하에 사는 할머니, 애인과 밤낮으로 싸우는 아주머니 까지. 뮤지컬 <빨래>의 등장인물 구성과 배경을 보면 우울하겠다는 예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빨래>의 가장 큰 매력은 완급조절에 있다. 어두운 현실을 담았음에도 유머를 잃지 않았고,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수위 조절에도 성공했다. 불법체류자라고 무시 받는 솔롱고의 곁에는 나영이가 있고, 서울에서 세상과 홀로 싸워나가는 나영이에게는 든든한 이웃들이 있다. 등장인물 각자에게 갈등이 존재하지만 각자에게 갈등을 해소해주는 인물들 역시 존재하고 있어 불편하거나 답답하지 않게 느껴진다.
3. 중독성 있는 음악의 힘
뮤지컬 <빨래>의 재관람을 부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음악이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사용하여 지루하지 않게 2막을 채웠지만 통일감이 무너지지 않는다. 나영이를 향해 부르는 솔롱고의 달콤한 세레나데 ‘안녕’과 ‘참 예뻐요’는 여성 관객의 마음을 녹이고, 나영이가 부르는 ‘빨래’, ‘슬플 땐 빨래를 해’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긍정의 에너지를 선사한다. ‘한 걸음, 두 걸음’, ‘비 오는 날이면’, ‘아프고 눈물 나는’을 통해 눈물짓게 하고, ‘서울 살이 몇 핸 가요’와 ‘나 한국말 다 알아’, ‘책 속에 길이 있네’ 등의 넘버로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4. 내공 있는 배우들의 연기
<빨래>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배우들의 연기이다. 남주인공 솔롱고는 몽골인 이다. 어색하고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객석에 대사를 전달해야 한다. 여주인공 나영은 극의 전체적인 흐름을 도맡아 짧은 시간 내에 인물의 희로애락을 모두 쏟아내야 한다. 주인 할매 역할을 맡은 젊은 여배우들은 공연 내내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노인의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나이를 지운다. 또한 대부분의 배우들이 1인 다역을 맡아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인물을 소화한다. 게다가 넘버도 쉽지 않다. 합창곡에서는 화음으로, 솔로곡에서는 폭발적인 고음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내공이 없는 배우들은 무대에서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밖에 없다. <미스사이공>으로 웨스트엔드에 진출 한 홍광호도 솔롱고를 거쳐 간 배우 중 한 명이다. 빨래의 OST를 통해 홍광호표 솔롱고의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임창정, 박호산, 정문성, 김재범, 성두섭, 김종구, 박정표, 최호중, 이규형, 이준혁 등 수많은 배우들이 솔롱고를 거쳤다.
5. 실현가능한 해피엔딩
짜임새 있는 구성과 아름다운 음악, 치밀한 드라마로 만들어진 뮤지컬 <빨래>는 ‘빨래’라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서 뽑아낸 희망과 위로라는 기막힌 감동은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실현 가능한 해피엔딩으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재벌 2세와의 결혼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TV 속 신데렐라가 아니라 어제보다 조금씩 더 행복해 진 사람들의 오늘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내일의 희망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아요.
- 뮤지컬 <빨래>, ‘빨래’
‘행운’의 상징 네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애쓰는 동안 밟히고 있는 ‘행복’의 상징 세잎 클로버처럼, ‘언젠가’의 행복을 위해 ‘어제’의 내 꿈을 잊은 사람들에게 뮤지컬 <빨래>는 ‘오늘’이라는 소중한 순간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 준다. 지금도 어디선가 한 걸음 두 걸음 내딛으며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고 소리 치고 있을 수많은 나영이들에게 순수한 사랑이, 따뜻한 이웃이 찾아오길 바란다. 그러나 그 전에 내가 먼저 외로운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는 것은 어떨까? 누군가의 솔롱고가, 주인 할머니가, 희정 엄마가 되어 ‘참 예뻐요’ 칭찬하고 ‘자 힘을 내’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도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글. 오은지 기자(ojang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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