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 영화, 문학, 대중음악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자극적인 소재와 선정적인 장면으로 대중을 끌어 모으는 작품이 늘어나고 있다. 막장이 하나의 트렌디한 장르인 것처럼 퍼져나간다. MSG에 길들여져 몸에 좋은 천연 밥상은 밋밋하게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극적인 문화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접하게 되는 뻔하고 극단적인 재벌, 조폭, 불륜 이야기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켜 줄 필요가 있다. 12월, 2013년을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는 연극 <환상동화>가 돌아온다.
▶ 10주년 기념, 대극장으로 컴백
<심야식당>, <커피프린스>, <카르멘>의 김동연 연출이 대본과 연출을 맡은 이 작품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예술을 꽃피웠던 취리히의 ‘카페 볼테르’*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이다. 연극 <환상동화>에 등장하는 카페의 주요 손님도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현실을 술과 노래, 시로 표현하는 아티스트들이다. 전쟁으로 시력과 춤을 잃은 무용수 마리, 청력과 음악을 잃은 작곡가 한스가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전쟁 속에서 꽃피는 예술과 사랑을 노래하는 이 작품은 2003년 변방연극제에서 처음 공연을 올린 후 매년 소극장에서 재공연 되었다. 2010년 이후 3년의 휴식기를 거쳐 올해 봄, 10주년을 기념공연을 가졌고 2013 한팩 우수레퍼토리 시리즈 기획공연으로 선정되어 대극장으로 돌아온다.
* 카페 볼테르 : 실제로 1916년 2월, 스위스 취리히의 ‘카페 볼테르’에서는 “세계대전의 대량학살에 질식한 우리 미술가들은 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로 시작하는 다다이즘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다이즘은 1920년대에 프랑스, 독일, 스위스의 전위적인 미술가와 작가들이 본능이나 자발성, 불합리성을 강조하면서 기존 체계와 관습적인 예술에 반발한 문화 운동이다.
▶ 연말을 따뜻하게 장식해 줄 아름다운 이야기
<환상동화>는 전쟁, 예술, 사랑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전쟁 광대, 예술 광대, 사랑 광대가 들려주는 동화로 표현했다. 전쟁광대는 인간의 파괴 본능을 자극하는 전쟁을, 사랑광대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애절한 사랑을, 예술광대는 영원불멸의 가치를 창조하는 예술을 최상의 가치라 주장하며 싸운다. 그리고 전쟁, 사랑, 예술 이 모든 것이 들어있는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환상동화가 펼쳐진다. 아이들에게 들려줄법한 예쁘고 아름다운 동화지만 유치하거나 가볍지 않다. 공연을 보고 나면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에 슬퍼하고, 전쟁 속에서도 꽃피는 예술에 감탄하고, 전쟁도 피할 수 없는 애절한 사랑에 감동할 것이다. 판타스틱 러브스토리라고 공연을 소개하지만 결국 세 광대 모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 <환상동화>의 매력
1. 오감을 만족시키는 종합 선물 세트
영상, 발레, 피아노, 마임, 마술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환상 같은 현실과, 현실 같은 환상을 보여주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공연이다. 다양한 장르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조잡하거나 불필요하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섬세한 연출에 감탄하게 된다. 특히 마리의 발레는 음악과 결합하여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은 오르골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2. 웃기지만 우습지 않다. 유쾌하지만 가볍지 않다.
전쟁, 사랑, 예술이라는 키워드만 보면 진지하고 지루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환상동화의 매력은 딱딱한 세 주제를 유쾌하고 발랄하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사람들이 ‘광대’이기 때문이다.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상상하고 갔다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강력한 웃음에 당황할 수도 있다. 감동으로 흘리는 눈물의 양 보다 너무 많이 웃어 흘리는 눈물의 양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다듬어지고 검증 된 탄탄한 <환상동화>의 대본은 웃음으로 가득하지만 절대 가볍지 않다. 어떤 상황도 코믹하게 만드는 광대들이 웃기지만 절대 우습지 않다. 비극을 희극으로 전달하는 광대들의 표현이 오히려 더 애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3. 광대, 광대, 광대
주요 내용은 마리와 한스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결국 광대이다. 2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을 이끄는 세 광대는 빠른 템포의 대사를 주고받으며 지루할 틈 없이 관객을 환상 속으로 끌어당긴다. 광대들의 해설에 맞추어 연기를 하는 한스와 마리도 매력적이지만 엄청난 대사량을 소화하는 광대들의 열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게 된다. 동화 속에서 무너지는 위압적인 전쟁광대, 때로는 섬세하고 때로는 뻔뻔한 예술광대, 쥐며느리로 변하는 애교만점 사랑광대의 매력에 푹 빠져 이들을 따라 울고 웃게 될 것이다.
4. 현실과 멀지 않은 이야기
‘전쟁’은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곳에 늘 존재한다. 총과 칼을 겨누는 전쟁이 아니지만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제쳐야 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등수로 평가 받는 학생들에게는 학교가 전쟁터고, 스펙으로 평가 받는 구직자들에게는 이력서가 전쟁터고, 실적으로 평가 받는 직장인에게는 회사가 전쟁터다. 치열한 전쟁 속에서 우리는 상처받고 때로는 상처를 주면서 살아간다. <환상동화>가 그저 동화 같은 이야기로만 남지 않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현실은 환상 같은 것,
환상은 현실 같은 것.
꿈꾸는 자에게 그 경계선은 무의미하다.
마음을 움직이는 작은 이야기가 인간의 삶을 변화 시킬 수 있다고 믿는 광대들처럼, 전쟁으로 소중한 것들을 잃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한스와 마리처럼, 우리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환상을 꿈꾼다. 평화로운 삶을 꿈꾸고, 위로 받기를 꿈꾸고, 사랑을 꿈꾸며 잠들어있던 행복을 깨울 것이다.
글. 오은지 기자(ojang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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