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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AL, ONE MORE TIME

떠돎과 한恨의 소리 <서편제>

 

“MUSICAL, ONE MORE TIME-원작을 모아 보는 시간-”은,

다양한 원작을 가진 공연작품을 그 원작과 함께 읽어보며 지난 공연의 재미와 의미를 되새겨보는 코너다.
첫 번째 작품으로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와 창극 <서편제>를 살펴보려 한다.

 


 

사진 출처ⓒ 국립극장 공식 블로그

 

  우리 고유의 정서에 대해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한恨의 정서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한의 정서인가? 한을 쌓는다는 것, 푼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모두 갖춘 책이 있다. 영화와 뮤지컬을 거쳐, 지난 추석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라온 창극 <서편제>의 원작인, 이청준 작가의 연작 소설 <남도사람>이다. 소설은 서로 다른 5개의 제목을 가진 연작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의 정서와 관련된 한 가족의 슬픈 ‘소리’ 들려준다.


  소설 속에서 한 많은 남도 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사내’라고 지칭되는 인물이다. 더불어 사내의 의붓아버지와, 친어머니가 난산 끝에 남기고 간 어린 누이가 등장한다. 이들 세 사람이 남도를 떠돌며 곳곳에 남긴 아픈 사연들이야 말로 <남도사람>을 통해 엿볼 수 있는 한의 소리, ‘한스러움’의 참 얼굴이다. 


  사내의 의붓아버지는 아내가 딸을 낳고 죽자, 어린 오누이를 데리고 세상을 떠돌며 소리로 벌어먹는다. 그러나 사내는 어머니의 죽음을 의붓아버지의 탓으로 여기며 그를 향한 증오와 복수심을 키워간다. 사내 마음속의 원망이 커져갈수록 아버지의 소리를 향한 동경 또한 커져가자, 결국 그는 어린 누이와 아버지를 떠나 도망간다. 딸까지 자신을 버리고 떠날까 두려워진 아버지는, 딸을 곁에 두기 위해 그녀의 두 눈을 멀게 만든다. 멀어버린 두 눈으로 늙은 아버지와 떠도는 그녀의 소리는 세월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도망갔던 사내 또한 잊히지 않는 소리의 얼굴을 찾아 한 평생 떠돌게 된다.

 

 

사진 출처ⓒ 국립극장 공식 블로그


  소설 속에서 세 사람의 마음속에 사무치는 한의 정서를 만드는 것은, ‘고향’과 ‘이향’ 사이에서의 끝없는 떠돎이다. 누이를 버리고 떠난 죄책감과 어린 시절의 소리를 찾아 끝없이 남도를 헤매는 사내, 아버지와 오라비와 소리 하던 선학동을 떠나 평생을 눈 먼 채로 떠도는 누이, 딸에 대한 미안함을 안고 소리를 하며 죽어간 아버지까지, 소설 속의 인물들은 제 각기 소리의 원형을 품고 몸과 마음을 뉘일 ‘고향’을 찾아 움직인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고향은 더 이상 예전의 그 곳에 있지 않으며, 이들은 주막으로 형성되는 한의 쉼터에서 잠시 몸을 쉴 뿐, 마음의 근원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게 된다. 여기에서 <서편제>를 관통하는 한의 정서가 쌓여간다.

 

사람의 한이라는 것이 그렇게 심어 주려 해서 심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닌 걸세. 사람의 한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누구한테 받아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동안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것이라네. 어떤 사람들한테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 되듯이 말이네…….

- 소설 <서편제> 中


  소설 속 사내의 말처럼, 나고 자란 곳을 떠나고 가야할 길과 돌아가고픈 길 위에서 방황하는 인생들은 평생에 걸쳐 한을 쌓고 있으며 또한 그 한을 위로 삼아 사람들은 계속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소설이 한의 축적과 떠돎의 연속이 인물들의 운명임을 보여주는 반면에, 창극<서편제>는 소설 속 그들이 쌓은 한을 마음껏 풀어내도록 마련된 굿판이다. 아버지와 오누이는 각각 유봉과 동호, 송화라는 이름을 얻고, 무대 위에서 그들이 짊어진 한의 정서를 소리로 표현하고 토해낸다.


  소리꾼들이 직접 하는 소리꾼의 이야기답게, 창극은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인 ‘소리’를 무대 위로 불러냈다. 유봉과 송화, 송화와 동호의 소리뿐만 아니라, 좋은 소리를 위해 노력하는 다양한 소리꾼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남도소리’를 느끼게 해준다. 무엇보다 작창을 따로 하지 않고, <심청가>의 주요 대목들을 공연 곳곳에 배치해서, 인물들의 심리와 갈등을 소리로 직접 풀어내게 하는데 창극만의 재미가 있다. 눈 못 뜨는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는 심청의 목소리와 자신의 눈을 멀게 한 유봉을 원망하는 송화의 목소리는 각자의 한을 짊어지고 있다는 데에서 아프게 겹쳐 들린다. 동호가 씻김굿을 통해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과 원망을 달랠 때, 무대 위의 소리는 관객들의 한까지도 털어낼 듯 한바탕 시원한 한풀이의 장을 만든다.

 

 

사진 출처ⓒ 국립극장 공식 블로그


  온 몸이 소리통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무대 위의 어린송화는 어느새 머리가 희끗한 노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버지의 소리와 북장단으로부터 도망갔던 동호는 아버지의 솜씨를 그대로 닮은 북솜씨를 가지고 송화를 찾는다. 공연의 마지막, 한 많은 세월을 보내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유봉으로부터 물려받은 소리와 장단으로 <심청가>의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을 함께 한다. 심봉사가 죽은 줄로만 알던 딸을 만나 눈을 뜨는 이 대목이 감격스러운 것은 한 평생 소리를 찾아 떠돌던 세 사람이 드디어 해후하며 득음의 경지에 속 시원히 닿기 때문이다. 비록, 장단이 끝날 때 한 겹의 한을 더 쌓으며 삶이 계속 될지라도 말이다.

 


 

글. 이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