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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yond the Stage

<날보러와요> 송여진 조연출

 

 

 

옛날에 무대를 꿈꾸는 한 소녀가 있었다. 중학교 때 처음 <인어공주>의 희곡을 본 날, 대사가 써 있는 것이 마냥 신기해서 소리내어 읽어보고 노래도 부르면서 온통 무대의 마력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녀는 무대에 오르기 위해 음악 공부를 하고, 연기 연습을 하며 청춘을 모두 보냈다. 그 작은 꿈이 성장하고 깊어져 지금은 자신의 작품을 올릴 날을 고대하고 있는 조연출 송여진. 앳띤 얼굴에 다부진 미소의 그녀는 2012년 연극 <필로우맨>을 시작으로 <넥스트 투 노멀>, <날 보러와요> 등에 조연출을 담당했고, 현재 오페라 <어린왕자>를 역시 조연출로 준비 중이다.

 

 

  연극 <리턴 투 햄릿>을 보면 배역 중에 조연출이 나온다. 그는 배우보다 미리 와서 연습실과 무대를 청소하고 연출의 노트를 대신 전달하고 배우들의 몸풀기를 직접 지시하기도 한다. 뮤지컬 <날아라 박씨>에 나오는 조연출은 주인공인 컴퍼니 매니저와 함께 작품의 스토리부터 캐스팅까지 모든 일에 관여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럼, 조연출은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하는 사람일까?

 

  “나의 역할은 한마디로 조-연출이다(웃음). 그러니까 연출의 모든 것을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알고 있어야 한다. 연출의 개인사까지 속속들이 파악하는 조연출도 있다는데, 나는 그렇진 않지만..(웃음) 그만큼 가깝고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연출님이 말하는 하나하나를 다 메모해서 계속 그걸 보고 참고한다. 만약 연출님이 자리를 비울 때는 배우들에게 대신 연출의 역할을 해줘야 하고, 배우들도 연출의 생각을 다 이해하지 못했을 때는 조연출한테 제일 많이 물어본다. 그럴 때 연출가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연출가만큼 충분히 있어야 한다. 사실 가장 신경이 많이 쓰이는 부분이다.”
 

  그녀는 지금껏 대부분 변정주 연출가와 함께 작품을 했다. 변정주 연출은 대학원에 다닐 때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모두 뮤지컬을 전공하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작품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고민이 스승의 눈에 띄어 조연출로 활동하게 된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을 때, 변연출님이 나의 졸업 작품을 잘 봐주셨다. 학부 3학년 때부터 내 작품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배우보다는 연출 쪽이 내가 쓴 작품을 더 잘 올릴 수 있어서 그런 고민을 연출님께 말씀드렸더니 우선 자신을 도와 조연출부터 시작해 보라고 하셨다. 사실, 연출님이 잘 봐주셔서 계속 작품을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나로서는 대단히 영광이다. 내 작품을 위해 틈틈히 습작도 하고 있는데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첫 작품인 <필로우맨>을 올리면서 그녀는 익숙치 않은 연극에 참여하기, 낯선 사람들과 친해지기, 첫 프로무대 경험하기 등등 인생의 새로운 도전과제들을 만났다. 공연은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고 협업이 많은 분야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과 부딪치고 배워가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섞여 들어가 동거동락하는 일을 오히려 즐기면서 그녀의 첫 무대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학교 다닐 때 뮤지컬전공이었기 때문에 조연출이 뮤지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알고 있는데, 연극은 처음 하는 거라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대본에 깨알같이 뭐든지 다 적어놓았다. 그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첫공연이 올라가던 날은 너무 긴장을 많이 해서 그날 하루 24시간이 엄청 길게 느껴졌다. 나중에 <넥스트 투 노멀> 할 때는 연극과는 또 달리 음악감독님이 하신 말씀을 다 적어 놓았다. 뮤지컬은 연극보다 복잡한 작업이 필요하지만 악보가 있으니까 훨씬 더 일을 재밌게 했다. 학생 때 뮤지컬을 많이 공부해서 악보 보는게 더 편하다. 게다가 <필로우맨> 할 때 더 긴장됐던 것이 나 외에 대부분의 배우와 스텝들은 이전에 다 서로 호흡을 맞춰본 친한 관계였다. 처음에 나 혼자 그 분위기에 섞여 들어가야 하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일부러 더 부대끼고 친해지려고 했고,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를 해도 그냥 나도 같이 웃으면서 분위기를 즐기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금방 친해졌다.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작업하는 것이 재밌고 배우는 것도 많은 거 같다.”


  그녀가 해온 작품들을 보면 흔히 작품성있고 내러티브가 살아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원작이 갖고 있는 힘과 명성이 뛰어난 작품들인데, 매번 새로 작품을 올리는 연출부의 입장에서는 그런 원작의 힘과 명성이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모두 공연 매니아층이 사랑하는 작품들이 아닌가? 요즘 날카로운 비평을 온오프라인에서 맹렬히 쏟아내며 활동하고 있는 공연 매니아층의 눈을 의식한다면 그 고민은 더 깊어질 거 같다.


   “지난 겨울에 <필로우맨>을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부분이, 2012년에 한번 해봤던 작품이기 때문에 이전 공연에 대한 기억과 잔상이 계속 떠올랐던 거였다. 새로 올라가는 작품은 새로운 마음으로 올려야 하는데 이전 공연에 대한 영향을 계속 받게 된다. 오히려 작품이 무대에 올라가니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변연출님도 매번 새로운 버전으로 작품을 올리려고 하시는데, 이전 작품의 영향력을 눈치보고 계시구나 살짝 느낄 때도 있다.(웃음) 작품성으로 명성이 있는 작품들을 하다 보니까, 이번 <날보러와요>때도 그랬지만, 서브텍스트를 스텝과 배우들이 충분히 공부한다. 관련된 책이나 당시 기사들을 많이 보고 실제 그때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의 심정을 느껴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다른 공연을 보러 갔을 때도 내가 공연을 즐기지 못하고 자꾸 작품을 분석하고 있게 되더라. 이제 직업병이 된 거 같다.(웃음)”

 

  조연출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작품에 대한 반응을 제작진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니 온라인에 올라온 공연평을 많이 볼 수밖에 없고, 특히 반복관람이 많은 매니아층의 비평은 꼼꼼히 챙겨 본다.

 

  “2012년에 <필로우맨>할 때 오퍼레이터도 담당했는데, 어제 왔던 관객이 오늘도 온 것을 여럿 발견했다. 그러면 훨씬 긴장이 되고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사실 내가 관객이었을 때는 공연 중에 흥분하면 막 그 흥에 취해 호응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옆에 앉은 회전문 관객들이 공연몰입에 방해된다고 눈치를 주고 그랬다. 지금은 내가 공연을 올리는 입장이 되니 배우들이나 오퍼의 실수 하나하나가 다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고 관객들의 지나친 호응도 걱정이 될 때가 있다. 반복관람 관객들의 리뷰는 실제로 우리가 놓쳤던 부분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아 뜨끔할 때가 있다.”

 

  올해 새롭게 찾아온 <날보러와요>는 2006년, 2009년 등 이미 여러 차례 재공연되었던 작품이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루었다는 시사성이 화제가 되었고,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으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권해효, 송새벽 등 당대 최고의 연극배우들이 거쳐간 작품이기 때문에, 손종학, 송영창, 이원재, 김준원으로 이어지는 올해의 캐스팅도 눈길을 확 가게 한다. 2014년 <날보러와요>는 어떤 특색을 가지고 만들었을지 관심이 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날보러와요> 2014 공연, 사진출처-playdb

 

  “이번에 <날보러와요>를 준비하면서 일부러 이전 공연의 영상을 보지 않았다. 새롭게 작품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형사들이 쓴 기록이나 책을 보니까 정말 그 상황에서 어쩔수 없는 답답함 같은 것이 느껴졌고 그걸 배우분들과 많이 공감했다. 올해는 캐스팅도 많이 바뀌었고 무대도 전보다 훨씬 추상적이고 심플하게 꾸몄다. 연출님이 작품의 소재가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미제사건이기 때문에 뭔가 사실적으로 다 표현하기 보다는 추상적으로 남기는 것을 의도하셨고 그런 방향으로 만들었다. 관객분들이 그냥 재밌는 연극 한편 보려고 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직접 범인을 잡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면 훨씬 재밌을 작품이다. 우리가 느꼈던 상황의 답답함을, 관객들도 형사의 입장이 되어서 작품을 보시면 2014년 <날보러와요>를 잘 느끼실 수 있을거 같다. 올해의 특징도 있지만 원작 자체의 힘이 대단한 거 같다.”

 

 

  어떻게 보면 조연출이란 역할은 작품의 모든 것에 다 관여하고 있기도 하지만 홀로 빛이 나는 배역은 아니다. 연출이든 배우이든 공연 오퍼든 항상 누군가를 보조하고 도와주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공연이 올라가기까지 정신없고 바쁜 하루하루 속에 자신의 중심과 꿈을 놓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려운 일처럼 보였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시간도 다음 작품인 <어린왕자> 연습 중 잠시 짬을 낸 것이었다. 그러나 송여진 조연출은 그 바쁜 와중에도 씩씩하고 명랑하면서도 진지하게 얘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2008년에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어 영국으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애비뉴큐>를 봤다. 사회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말이 주는 재미와 재치를 활용해서 너무나 흥겹고 신나게 만들었더라. 단번에 나도 저런 작품을 꼭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부터 꾸어왔던 꿈이지만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은 순간도 많았고 실제로 공연계를 떠나려고 일반회사에 취직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시선은 언제나 공연 포스터나 개막 일정, 이런 것만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에게 공연은 마약과 같다. 도대체 헤어나올수가 없고 이것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다. 공연을 준비할 때는 연습이니 셋업이니 하며 전쟁과 같아도 관객의 박수소리를 들으면 한순간에 피로가 사라지고 새로운 힘을 얻는다. 공연이 끝나면 배우처럼 나도 공허하고 허탈하게 있을 때가 많다. 조연출은 당연히 직업으로서 근무조건도 열악하고 주목받는 역할은 아니지만 공연을 통해 사람들하고 부딪쳐서 일하는 게 재미있고, 새 작품을 만나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대해 기대감이 생기고 그 힘으로 움직이게 된다. 지금 연습하는 <어린왕자>도 나로서는 처음 해보는 오페라 작품이라 배울게 많고 특히 음악이 너무 좋아서 음악의 느낌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 어린이 극이 절대 아니고 남녀노소 다 볼 수 있는 작품이니까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 예술의 전당

 

  우리는 공연스텝들의 어려움을 종종 전해 듣지만, 그 상황 하에서도 그들이 쏟아내는 열정과 노력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지금과 같은 수준 높은 공연들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관객의 한사람으로서 언제나 조연출같은 스텝들의 노고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언젠가 <애비뉴큐> 같은 작품을 올리는 연출가 송여진의 이름을 공연 팸플릿에서 만날 날을 기약해본다.

 


글. 강지나  기자 wingles@hanmail.net

사진. 최영현, 이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