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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엠 그라운드

자살, 그 쓸쓸함에 대하여

 

 


  자살이란 그 원인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당사자가 자유의사에 의하여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를 말한다. 자살의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 자살이 윤리적으로 긍정되는가, 부정되는가에 대한 논의는 예전부터 지속되어 왔으나, 그 시비는 쉽게 가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로부터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있어왔으며, 자살에 이르게 된 원인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은 저서 <자살론>에서 자살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그는 자살의 유형을 사회통합도에 따라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로 구분하였고, 사회적 규제에 따라 ‘아노미(anomie)적 자살’과 ‘숙명적 자살’로 구분하였다.
 

  ‘이기적 자살’은 개인과 사회의 결합력이 약할 때의 자살이다. 일상적인 현실과 좀처럼 타협 또는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살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타적 자살’은 그 반대로 과도한 집단화를 보일 경우, 즉 사회적 의무감이 지나치게 강할 때의 자살이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를 몰고 미군 군함으로 돌진했던 일본군 자살특공대(가미가제)가 있다.
 

  ‘아노미적 자살’은 사회정세의 변화, 사회 환경의 차이 또는 도덕적 통제의 결여에 의한 자살이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지던 가치관이나 사회 규범이 혼란 상태에 빠졌을 때 자주 일어난다. ‘숙명적 자살’은 사회가 과도하게 욕망을 억압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절망 속의 자살을 낳는데 노예의 자살이 대표적이다. 

 

  갈등이 보다 극적으로 드러나는 뮤지컬의 장르적 특성상, 뮤지컬 내에서 인물의 자살은 흔하다. 인물은 자살을 통해 비극성을 심화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악한 인물이 자살을 통해 사라지기도 한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연인들은 동반자살로 다음 생을 기약하며, 사회적 억압을 견디지 못하는 인물은 자살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 억압으로부터 해방된다.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 상황에서 뮤지컬 속 인물들은 자살을 통해 상황을 극적으로, 빠르게 마무리한다. 

 

  한편, 인물의 모호한 자살로부터 극의 주요 갈등이 시작되기도 한다.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불분명한 인물의 죽음으로부터 극의 갈등이 발생하고, 남겨진 이의 괴로움과 고통이 극의 주요 흐름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극에서는 인물이 자살이 아닐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남겨진 인물의 후회, 고뇌 등에 집중하게 된다.

 

 이렇듯 뮤지컬에서의 자살의 동기, 극의 전개에서 인물의 자살이 미치는 영향, 자살의 결과 등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아이엠 그라운드 네 번째 시간, 이번 시간에 는 뮤지컬에 등장하는 다양한 ‘자살자’들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았다.

 



#1. 피하고 싶은 삶


[엠마] 아이엠 그라운드 네 번째 시간! 이번 시간은 ‘자살자’ 특집입니다.

[루시] 신년부터 아주 느낌이 팍 있는 주제예요!

 

[엠마] 정초니까 특별히 다크다크 하게~! 뮤지컬 작품 속에서는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 편인 것 같아요.

[루시] 맞아요. 작품 속에 ‘죽음’도 자주 등장하고, 또 그중에서도 ‘자살’ 많이 보이긴 하죠.

 

[엠마] 아마도 극의 결말이 자살이거나, 주인공이 자살을 한다거나… 하는 등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에 남아서 그렇지 않을까요?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많은 것처럼 자살을 하는 이유나 원인 역시 다양해요.

 

[루시] 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현실의 삶을 견디기 힘들다’로 묶여지지 않나요?

[엠마] 생존은 인간의 본능인데, 자살은 그걸 거스르는 선택이잖아요. 그러니 그 생존본능도 견디기 힘들만큼 삶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일 거예요.

 

[루시] 현실에서의 자살률이 높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테고요. 현실보다 더 드라마틱한 뮤지컬 속에서 자살이 흔한 건 그러고 보면 크게 놀랄 일도 아닌 것 같고. 또 현실을 투영한 소설, 영화, 드라마 등등에서도 자살은 자주 등장하고요.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엠마] 뮤지컬에서 자살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사랑’이에요. 뮤지컬에는 사랑이야기 많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리고 ‘사랑 때문에’ 자살하는 건 다른 자살 보다는 좀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루시] 아무래도 뮤지컬이 현실을 직접적으로 투영하기 보단 약간 판타지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뮤지컬 속 자살은 가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 될 때가 있어요. 그래서 현실의 자살을 대할 때와 다르게 때론 굉장히 설득당하잖아요.

 

[엠마] 정말 현실적인 이야기,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빚에 시달리고 이런 내용의 뮤지컬을 속에 등장하는 자살을… 누가 보고 싶어 할까요? 거기다 결말이 희망이 없고 그런 내용이면.

 

[루시] 그만! 그런 건 현실에서도 충분해요!

 

 

#2. 사랑하기 때문에

 

[엠마] 다시 사랑이야기 속 자살로 돌아와서, 보통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루시] 사랑훼방꾼이나 사랑을 이루는데 방해되는 환경이 사라져서 사랑을 이룬다면 그건 해피엔딩으로,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랑을 이루기 어려워지면 새드엔딩으로 끝나잖아요? 새드엔딩도 서로 사랑하는데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연인이 있겠고, 또 짝사랑을 하다 그만 두는 경우가 있겠죠. 보통 새드엔딩에서 자살이 자주 등장하고요. 

 

[엠마] 연인이 동반자살을 하는 경우를 먼저 좀 살펴볼까요? 저는 <번지점프를 하다>에 인우와 현빈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두 사람의 겉모습은 선생과 제자잖아요. 그것도 둘 다 남자. 하지만 현빈이 인우의 과거의 연인이었던 태희의 환생임을 자각하고 두 사람이 함께 하기 위해서 자살을 선택하죠. 두 사람은 현실의 기준에서는 남들의 이해를 받을 수 없는 그런 사랑이니까요.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현빈과 인우


[루시] 뭐니 뭐니 해도 동반자살하면 로미오와 줄리엣 아니겠슴까! 그런데 재미있는 건 로미오와 줄리엣의 경우엔 ‘너 없는 세상 나는 못 산다’ 이런 심정이 느껴진다면, 인우랑 현빈이는 ‘우리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 이런 아련한 뭔가가 있어요. 어찌 보면 동서양의 관점의 차인 것 가고. 동양에서는 환생의 정서가 있잖아요. 또 <번점>은 작품 자체에서 환생을 다루고 있기도 하고요.

 

[엠마] 동감이에요. 인우와 현빈 쪽이 보다 희망적인 자살이랄까요. 끝이지만 끝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줘요. 또 이미 현빈=태희의 환생이니까 둘이 다시 환생할거라는 가능성을 관객이 은연중에 품을 수 있게 하기도 하고요.

 

[루시] 동반자살의 다른 인물로는 <황태자 루돌프>의 루돌프와 마리가 있지 않나요? 두 사람은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엠마] 아! 루돌프와 마리! 두 사람은 사회적 환경에 의해 자살을 하는데요, 그 환경이 두 사람의 사랑을 억압하는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 마리와 루돌프


[루시] 그래요? 전 루돌프가 결혼한 상태에서 마리를 만났고 그리고 두 사람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도만 알고 있어서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자살한 줄 알았어요. 참고로 전 작품을 보지 못했답니다.

 

[엠마] 둘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아서 동반자살 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극 자체도 둘이 사랑으로 시련을 겪는데 중점을 두기 보다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황태자’ 루돌프의 갈등이 초점을 두었고요. 루돌프는 아버지와의 갈등, 변화하는 시대에서의 고뇌 때문에 자살을 하는데 거기에 마리는 부록처럼 같이 죽는 느낌이랄까요?

 

[루시] 부록이라뇨. 마리에게 너무하세요. 하하하. 루돌프가 19세기 후반에 살았던 사람이니까 격변하던 시대가 그에게 많이 영향을 끼쳤나보네요. 그러고 보니 루돌프의 어머니인 엘리자벳 황후의 이야기도 뮤지컬 <엘리자벳>으로 만들어지게도 했네요? 

 

[엠마] 역사적으로도, 한 가족사로써도 극적이었던 것 같아요. 아, 실제로 황태자 루돌프는 자살이 아니라 타살일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총을 맞은 위치라던가 손목의 각도라던가 이런 게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고 하는데 뭐,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루시] 아… 음모론 나오나요? 루돌프가 그 당시 자살에 심취해 있었다고도 하는데 그럼 그의 자살은 역시 현실 도피에 가까웠을 수 있겠군요. 마리는 그럼 사랑하는 사람 따라 간 건가요?

 

[엠마] 루돌프의 자살은 사회적 환경+사랑이었다면 마리의 자살은 사랑 100% 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고 보니 동반자살인데 결국 자살의 동기는 참 다르네요?

 

뮤지컬 <글루미데이>(좌), 뮤지컬 <콩칠팔새삼륙>(우)

그들의 자살은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


[루시] 싱기방기. 창작뮤지컬 중에서는 윤심덕과 김우진의 자살을 소재로 한 <글루미데이>가 사랑 때문에 동반자살을 한 경우가 아닐까요? 실제로도 두 사람은 동반자살을 했고요.

 

[엠마] <글루미데이>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극에서는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요. 실제로 두 사람이 자살한 후에 두 사람을 봤다는 증언도 있고 그랬다니까요. 아무튼 당시 신여성으로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윤심덕과 유부남이었던 김우진의 사랑은 사실 당시 상황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웠고 그래서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 한다…는 게 이야기의 큰 줄기에요.

 

[루시] 그러고 보니 비슷한 시기의 동반자살 실화를 다룬 <콩칠팔새삼륙>도 있네요. 여고동창생이지만 서로를 사랑했던 두 여자가 결국 기찻길에서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하잖아요. 작품에서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있으나 여성은 배우지 말아야한다는 구시대적인 사상에 좌절한다거나,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동성애자의 모습도 함께 그리고 있죠.

 

[엠마]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자살이 팽배하는 것 같기도 해요. 한국이든 외국이든 말에요. 19세기말 20세기 초반은 세계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잖아요. 과거와 현재가, 사상과 사상이 섞이고…

 

[루시] 맞아요. 뭔가 좀 뒤죽박죽인 그런 사회 상황. ‘높은 이상 비루한 현실.’ 이런 말을 쓰기도 했네요.

 

[엠마] 정확한 표현 같아요.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가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빨리 왔다’라는 말을 했는데… <글루미데이>, <콩칠팔새삼륙>의 주인공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인 것 같아요.

 

[루시] 이들은 서로 사랑했지만, 당시 시대상황이 그들을 절벽으로 몰아서 생을 마감한 경우 같네요. 죽음이 아니면 서로 갈라져야하니까, 그만큼 절박한 선택으로 보이기도 해요.

 

 

#3. 사랑을 위해서


[엠마]
그래도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세상을 떠났으니 죽는 순간에는 행복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뤄지지 못한 사랑으로 혼자 자살하는 경우도 많죠? 예를 들면 베르테르나, 베르테르라든지, 베르테르같은?

 

뮤지컬 <베르테르>, 베르테르는 자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다


[루시] 사랑을 빼고라도 베르테르는 자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잖아요. 베르테르 효과로. 베르테르효과는 유명인이나 자신이 닮고자하는 이상형이 자살을 할 경우 그를 모방해 자살이 늘어나는 현상이에요.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하고 난 다음에 모방 자살이 증가했던 데에서 유래했고요. 원작이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뮤지컬에서는 베르테르가 자살한 이유가 롯데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느낌 반, 또 이기적이다 싶은 느낌 반 이었어요.

 

[엠마] 롯데를 떠난 건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지만 정말 끝까지 그녀를 위했다면 자자살을 하지 말아야 했을 것 같아요. 그냥 멀리 떠나는 정도?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하면서 롯데에게 어떻게 보면 자기를 영원히 기억시키게 된 거고. 그런 면에서는 좀 이기적이에요.

 

[루시] 원작은 되게 절절했던 것 같은데… 자살도 바로 끝나지 않고… 좀 오랫동안 괴로워하면서 죽고 그렇잖아요. 뮤지컬에서는 해바라기와 함께 되게 아름답게 묘사되었지요?

 

[엠마] 그런데 베르테르가 총 쏘고 막 괴로워서 굴러다니고 이런 장면이라면… 좀 그렇지 않아요?

 

[루시] 굴러다니다니… 아니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빵 쏘고 누워서 독백을 한다던가, 다소 헐떡이며 죽던가… 해바라기와 함께 한 엔딩은 아름답긴 했는데 뭔가 짝사랑남의 애틋하고 그런 건 좀 아쉬웠다고 할까요?

 

[엠마] 그런 면에서 <번점>에서는 자살 후에 나오는 내레이션이 참 좋았어요. ‘여기서 떨어져도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이 말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사랑합니다.’ 뭐 이런 대사였어요. 찡~해요 자살하는 장면 직접 안 나오는 것도 좋았고요.

 

[루시] 말 그대로 가슴에 여운 하나 남겨두고 끝나는 극이었네요?

 

[엠마] 반면에 <풍월주>에서 담의 자살은 너무 직접적으로 표현되어서 놀랐어요. 초연 때는 아찔한 높이에서 배우가 뒤로 떨어졌는데, 물론 안전장치야 다 되어있었겠지만 좀 위험해 보였거든요.

 

뮤지컬 <풍월주>,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다


[루시] <풍월주>에서도 주인공들이 자살을 하나요? 전 작품을 보지 못해서요. 전 왜 이렇게 못 본 작품이 많죠?

 

[엠마] 결국 사랑 때문에 자살을 하게 되요. 배경은 신라시대에요. 진성여왕이 남자기생인 열을 사랑해서 가까이 두려하지만, 열은 거절해요. 열에게는 담이라는 소중한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결국 여왕은 담을 죽이고, 열을 가지려 하고, 담은 자신이 직접 죽어야 열이 의심을 하지 않을 거라며 자살을 해요. 마지막엔 열이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열도 자살을 하죠.

 

[루시]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어지기 위한 죽음 보단 지키기 위한 죽음이네요?

 

[엠마] 네. 그리고 ‘여왕’이라는 절대 권력이 있는 한 둘의 사랑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요. 열과 담의 자살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절망에 의한 죽음이라기 보단 외부 권력에 의한 타살 같은 자살이랄까요?

 

[루시] 나 같으면 야반도주 고고싱! <닥터 지바고>의 파샤도 자살을 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사랑 때문에 자살한 것 같고, 또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죠?

 

뮤지컬 <닥터 지바고> 파샤, 그의 자살은 복합적이다


[엠마] 제가 생각하는 파샤의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은 사랑보다는 시대상 쪽이 큰 것 같아요. <닥터지바고>가 러시아 혁명 당시를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고 파샤는 그 역사 속에서 혁명가로 살았잖아요. 하지만 파샤의 혁명적 이상은 실패했고, 사행집행 전에 도망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 손으로 의로운 죽음을 선택했다는 느낌에요.

 

[루시] 저 역시 파샤가 복잡한 심경으로 죽었을 거 같은데… 거기가 얼음궁전인가요? 거기에서 지바고와 대화를 하고 난 다음에 더 이상 자기가 있을 곳이나 지킬 것이 없다는 사실과 자신이 없어져야 라라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을 것 같아요. 파샤가 혁명을 꿈꿨던 이유 중에 하나가 라라를 아프게 한 현실에 대항하는 측면도 있었잖아요.

 

[엠마] 파샤의 자살도 사랑과 사회 복합적인 것 같네요.

 

[루시] … 근데… 예전에는 사랑 때문에 죽는 게 되게 낭만적이었는데… 나이 드니까 그런 죽음이 안타까워요. 사람은 또 만날 수 있는 건데… 죽고 못 산다고 해도. 오래 살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 아, 나는 순수함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눈물). 

 

[엠마] 그래서인지 극 중에서 자살하는 나이들이 좀 어리지 않나요? 게다가 다 운명적인 사랑을 하잖아요.

 

[루시] 짧고 굵게 사랑한 경우가 자살한 경우가 많죠.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건도 3일 만에 다 벌어진 일이니까. 사랑 할 수 있는 그 열정이 부럽기도 하지만 이제는 이기적이 되어서….

 

[엠마] 어떻게 보면 자살은 사랑을 미완으로 끝내면서 사랑이 이루어져있을 때의 현실적 단면들을 다 차단해버리고, 아름다운 순간만 영원히 남기는 것 같기도 해요.

 

 

#4. 신념, 죄책감, 책임…


[엠마] 자살의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 개인적, 사회적 신념인 경우도 꽤 있어요. 대표적으로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자베르!

 

[루시] 우선 자베르가 대표적인 악역으로 구분된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전 이해를 못하겠어요! 공정한 법 집행을 위해 장발장을 스토커처럼 따라 다닌 거 아니었나요?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자베르의 자살은 어떤 면에서 되게 숭고한 것 같아요.

 

[엠마] 그렇죠. 사실 자베르는 일반인의 생각으로는 죽을 이유가 없어요. 아니 장발장이 그 고생을 해서 살려줬는데 바로 자살해버리면…… 도와준 사람 성의도 있는데 말이죠!

 

(왼쪽부터) 뮤지컬 <레 미제라블> 자베르, <블랙메리포핀스> 메리, <지킬앤하이드> 지킬, <JCS> 유다

 

[루시] 도와준 사람의 성의라뇨! ㅋ 자베르의 자살은 좀 비극적이에요. 자신의 신념과 장발장에 대한 고마움 충돌 때문에 죽었잖아요. 자기가 살아 있는 한 장발장을 잡아야하는데, 장발장은 자기 은인이고. 결국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장발장의 은혜를 갚는 게 자살인 상황.

 

[엠마] 마음속에서 절대 타협할 수 없었던 굵은 가지가 부러진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에요. 어떻게 보면 참 레미제라블에서 선악을 구분하는 게 무의미하다 싶어요.

 

[루시] <레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에서도 그렇지만 시대가 악당이죠. 애초에 모든 사건의 발단이 결국은 그 시대 때문이었으니까.

[엠마]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살한 경우가 또 있을까요? <지킬앤하이드>의 지킬이 떠오르는데…

 

[루시] 신념보단 다른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잘못으로 벌어진 모든 일을 자신이 수습하고 가겠다는 것 같아요. 지킬은 선악을 분리하는 약물의 실험대상이 되잖아요. 그러나 실험의 실패로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아 하이드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자 최후의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하니까요.

 

[엠마] 지킬 하고 비슷한 사람이 한 명 떠오르는데요. <블랙 메리포핀스>의 메리 역시 그런 의미에요.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던 비밀 실험에 참가했던 그녀는 나중에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살을 했죠. 그 진실이라는 게 아이들을 괴롭힐게 뻔 하니까 자신이 안고 사라지는 쪽을 택한 거죠.

 

[루시] 죄책감은 죄책감인데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유다. 사랑하는 스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 강렬한 죄책감이 그의 자살의 가장 큰 동기였죠.

 

[엠마]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일에 대한 후회, 두려움, 죄책감 뭐 이런 것들이었겠죠.

 

 

[루시] 근데 유다가 자살하는 장면에서 코러스는 ‘잘했다 유다’라고 말하는 게 뭐랄까 좀 인상적이랄까. 대의를 위해서는 잘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게 참 견딜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5. 예민한 사춘기, 궁지로 몰리는 아이들


[엠마] 앞서 뮤지컬에서 자살은 좀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고 했는데, 뮤지컬에서도 현실적인 자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에요.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모리츠가 그렇죠.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청소년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세련된 음악과 함께 무대화 한 작품이죠. 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성애, 부모로부터의 학대, 성적에 대한 압박 같은 걸 다루고 있어요. 모리츠는 성적에 대한 압박으로 죽음을 택해요.

 

[루시] 모리츠의 자살은 굉장히 현실적이에요. 슬프지만 이런 유형의 자살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고요. 모리츠가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데, 도움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던 게 좀 많이 안타까웠어요. 그리고 <스프링 어웨이크닝>과 동일한 원작으로 만들어진 창작뮤지컬 <사춘기>에서도 모리츠에 해당하는 선규라는 인물이 자살을 택해요.

 

[엠마] 음… 모리츠 말고 또 누가 있을까요? 사업 실패해서 자살하거나 뭐 이런 경우의 뮤지컬이 없으니… 사업실패가 성공으로 귀결되는 경우는 있겠지만요.

 

[루시]  사업실패로 자살이라뇨! 본격 뉴스 뮤지컬 나오겠네요.

 

뮤지컬 <스프링어웨이크닝>. 모리츠의 장례식


[엠마] 뮤지컬에 국한하지 않는다면, 연극 <모범생들>에서 명준이라는 인물이 자살시도를 해요. 명준이가 수학시험을 보는데 아무리 다시 풀어도 자신의 답이 보기에 없는 거예요. 그 문제 때문에 결국 시험을 망치고,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로 유서를 써요. 가난한 택시기사의 아들인 명준은 서울대에 가서 대한민국 0.3%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이루지 못하는 자신의 실력에 좌절해서 자살 생각을 하는 거죠.

 

[루시] 연극하니까 떠오르는 작품이 있는데 <니 부모 얼굴을 보고 싶다>. 이건 왕따를 당한 학생이 자살을 하고 난 다음에 가해자와 피해자 부모들의 모습을 보여줬었죠. 이 작품의 작가는 실제 중학교 교사였고요.

 

[엠마] 맞아요. 작품 속에서 가해자들의 학부모가 모여서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다가 화병이 날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학생들이나 교육을 다룬 이야기 속의 자살이 좀 현실적이라는 게 씁쓸하게 느껴지네요.

 

[루시] 그러게요. 그런데 학창시절에 있었던 일 중에는 지나고 보면 그게 진짜 별게 아닌 게 많기도 하잖아요. 나이 들고 사회에 나오면 진짜 별의별 일을 다 마주하니까요. 그래서 작품 속에서 학생들이 자살을 하거나 하는 건 좀 마음이 더 그래요.

 

[엠마] 그때는 그게 내가 보는 세상의 전부니까요.

 

 

#6. 분명히 타살인데… 자살일 것 같기도 하다


[엠마] 분명히 타살인데 죽은 사람의 의도대로 타살이 발생한 경우가 있어요. 다른 사람의 손에 자신 죽음을 택한? 그런 인물들도 있어요. 대표적으로 뮤지컬 <레베카>의 레베카.

 

[루시] 이 언니는 진짜 정말 대단한 여자인 것 같아요.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고도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하고, 작품 제목도 자기 이름이고. 죽은 후에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끼치잖아요. 그리고 작품 후반에는 레베카의 죽음의 원인이 밝혀지면서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도 하죠.

 

[엠마] 죽을 거면 곱게 죽을 것이지 왜 한 사람의 마음에 큰 데미지를 주냐고요! 혼자 곱게 자살해도 되는 걸 굳이 남편의 손을 빌린 건 또 뭐람!

 

[루시] 레베카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게 죽는 다는데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자살을 용납 못했던 거 아닐까요? 나 같은 여자가 자살이라니! 말도 안 돼! 이런 거. 또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남자에 복수 같은 것도 있지 않았을까요? 결국 자살과 동시에 다른 목표 두 가지를 동시에 성공하는 거죠.

 

[엠마] 으휴. 못된 여자! <지저스크라이스트수퍼스타>의 지저스도 비슷한 거 같아요. 지저스는 자신의 사명의 완수하기 위해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를 위해서는 유다의 밀고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유다를 도발하기도 하고 그러죠.

 

[루시] 생을 마감하는 계획을 위해 누군가가 필요했던 두 사람. 근데 내 손으로 한 게 아님!

[엠마] 이것이 바로 손안대고 코풀기!

 

[루시] 그렇죠.

 

 

#.7 떠난 사람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엠마] 자살인지 아닌지 모호한 경우도 있어요. <스토리오브마이라프>의 앨빈이나, <나쁜자석>의 고든의 죽음이 그래요. 둘 다 자살이기는 하지만 뭔가 명확하지 않아요. 목격자도 없고, 동기도 뚜렷하지 않고.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앨빈. 그는 정말 자살했을까?


[루시] 두 작품 모두 자살자가 주인공은 아니에요. 보통 자살이 극의 결말이 되는데, 이런 종류의 극에서는 자살이 극의 시작이에요. 극의 모든 갈등이 인물의 자살로부터 시작하는 거죠. 이런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자살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이고요.

 

[엠마] 이들의 자살은 주인공들이 자살한 친구와의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삶도 돌아보고 내적인 성숙을 이루죠. 물론 <나쁜자석>의 프레이저는 고든이 죽고 난 다음 현재까지 계속 시궁창을 헤맸던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요.

 

[루시] 이런 노래가 생각이 나네요. ‘있을 때 잘해~ 그러니까 잘해~’ 뭐, 이런 노래(웃음). 그나저나 그 둘은 진짜 죽었을까요?

 

[엠마] 저는 둘 다 죽었다고 생각해요. 앨빈은 동기도, 자살인지 사고사인지도 모호하지만 시체를 찾았으니까요. 고든이 좀 알쏭달쏭 하지만… 저는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루시] 저도 둘 다 자살이라고 생각하는데, 앨빈과 고든이 어떤 이유로 자살을 선택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남겨진 사람들이 아파하는 걸 보면- 역시 자살은… 없는 게 나은 것 같아요. 자살이 결국은 어떤 문제에 봉착해서 선택하게 되는 해결책이잖아요. 현실에서는 사랑을 이룰 수 없으니까, 가혹한 현실을 견딜 수 없으니까, 사는 게 죽는 것 보다 더 힘드니까… 이건 누구한테나 생길 수 있는 문제거든요. 그런 벽에 부딪쳤을 때 진짜 다 놓고 싶다…라는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요?

 

[엠마] 자살은 갈등을 너무 손쉽게 포기해버리는 결말이죠. 극에서야 2시간 안에 끝나야 하니까 자살로 맺음을 할 수 있고 누구나 그게 가상의 이야기라는 걸 감안하고 보는 거지만, 인생은 2시간이 아니잖아요.

 

[루시] 죽는 건 끝이잖아요. 그 다음이 없음. 다음에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고, 다음엔 더 좋은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뭐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어째든 50%라는 큰 확률을 저버리고 정말 끝! 이거니까. 그리고 남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할 짓이 아니죠. 대표적인 예 프레이저!

 

[엠마] 맞아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느꼈을 절망, 아픔 그런 걸 고스라니 남기고 가는 거죠. 자살은.

 

[루시] 셰익스피어 리어왕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답니다. 최악을 말할 수 있는 한 최악은 아니다!

[엠마] 그러하다!

 


 

글. 최영현 기자(snow7wons@gmail.com)

박초희 기자(bono1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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