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시녀의 공연 일기

뮤지컬 <아가사>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5. 5. 12:01

 

 

날짜: 2014년 3월 1일
날씨: 여름 같았다
오늘 한 일: 뮤지컬 <아가사> 관람
내일 할 일: 개강 준비

 

  내 생에 가장 많이 관람한 공연을 뽑으라면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다. 고등학생 시절, 야자를 튀어가며 관람했던 추억 속에 존재하는 <지킬 앤 하이드>는 학생 신분으로 모으고 모았던 적금을 깨면서까지 관람한 공연이었다. 그 뒤를 잇는 작품이 바로 최근에 막을 내린  뮤지컬 <아가사>다. 동국대 이해랑 극장에서 처음 관람한 <아가사>는 팽팽한 긴장감과 화려한 영상미, 탄탄한 대본으로 나를 매료시켰다. 그래서 대학로에서 앵콜 공연이 올라온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예매를 했다. 그리고 고대하던 대학로의 첫 <아가사> 관람일. 나는 느꼈다. 새집 특유의 신나 냄새와 딱딱한 등받이, 조금만 움직이면 내게 닿는 옆 사람 다리의 온기를.

 

  뮤지컬 <아가사>는 유명한 여류 추리소설작가인 아가사 크리스티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발간한 바로 직후인 1926년 12월 3일부터 열하루 간 실종되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한 뮤지컬이다. 추리소설의 여제인 그녀와 ‘라비린토스’라는 단어를 연관 지은 것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그렇게 생각할 쯤에, 옆 사람과 한 번 더 다리가 닿았다. 부끄럽게.

 

  소극장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아가사에는 수많은 볼거리들이 즐비 한다. 전주곡 시작 부분에서 영상으로 보이는 미궁, 레이몬드의 노래에 맞춰 마리오네트처럼 기계적인 춤을 추는 배우들, 아가사와 레이몬드가 넘버 ‘라비린토스’를 부를 쯤에 창문에 비치는 건맨의 그림자, 로이의 정체가 드러나자 보이는 미궁 내부의 영상.

 

  사실 대명문화공장은 아가사를 올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무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해랑보다 좁은 무대로 인해서 이해랑 극장에 맞춰 만들어진 무대 세트는 거의 꾸겨져 들어갔고, 백스테이지의 불빛이 무대 조명보다 훨씬 강하게 객석을 비추는 경이로운 순간이 탄생했다. 심지어 배우의 등퇴장에 암막 천이 휘날릴 때, 나는 주인공 남배우가 코를 푸는 모습을 목격했다. 오만원이라는 싼 가격으로 공연도 보고 배우의 은밀한 사생활도 보게 되다니! 카메라를 사용할 수 있다면 이걸 찍어 폴 뉴트런에게 팔아넘기고 싶었다. 그럼 돈 주겠지?

 

▲ (위) 이해랑 극장의 무대, (아래) 대명문화공장 극장의 무대

 

  공연의 시작은 표절작가로 낙인찍혀 모든 걸 잃은 레이몬드 애쉬튼이 과거 이웃집에 살았던 아가사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유 없는 악몽에 시달리고, 직감적으로 그것이 아가사와 연관이 있음을 알고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다정한 하녀인 베스와 사랑하는 남편 아치볼드, 유쾌한 신문기자인 폴에게 둘러싸여 웃는 그녀는 화려하지만 진딧물에게 영양을 모조리 빼앗기는 붉은 장미처럼 지쳐가고, 결국엔 자살을 결심한다. 그리고 아가사와 너무나도 다른 남자인 로이가 그녀를 구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반전을 가진 대본이지만 세상은 아주 오래 됐고, 인간이 짜낼 수 있는 모든 반전은 애저녁에 추리소설가들이 전부 써먹었다. 이제 작가들에게 남은 과제는 반전을 ‘어떤 식으로 전개하고, 표현할 것이냐’이다. 아가사의 작가는 그 진부한 반전을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기법을 통해 기막히게 표현했다. 

 

  공연에서 로이는 ‘실존 인물이 아닌, 아가사 내면의 살의’로 나온다. 아가사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다 못해 아가사의 외부로 튀어나와 그녀의 기사가 되는 로이는 극 중 아가사에게 많은 것을 해준다. 아가사를 위해 테레사 닐이라는 이름으로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잠에서 도통 깰 생각을 않는 그녀에게 약을 처방하고, 음식을 가져다주고, 함께 파티에 가며 정신적 애정관계를 형성한다. 이 부분은 일반적으로 다중인격을 가진 사람들의 만들어진 인격들이 나타내는 공통점이기도 한데, 그 인격들은 보통 원래의 인격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서 도피하기 위해 만들었음으로 원래의 인격에 애정을 느끼고 지켜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곤 한다. 로이는 이런 만들어진 인격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캐릭터다.

 

 

  로이의 정체는 아가사를 향해 외치는 호텔 서버의 대사를 통해 밝혀진다. ‘테레사 닐, 혼자 체크인 하셨잖아요!’ 공연의 반전이 시작되는 부분이자 아가사가 로이의 정체를 알게 되는 이 대사는 극에서 터닝 포인트 역을 하지만 동시에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렇다면 아가사와 로이 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실제 일어난 일이었을까? 아니면, 망상이었을까? 아가사 혼자 호텔의 체크인을 하고, 혼자 옷을 사서 자신에게 선물하고, 혼자 가면무도회에 간 것인가? 아니면, 홀로 넓은 호텔에 앉아 남편과 하고 싶던 모든 일에 다른 남자를 대입해 망상한 것인가?

 

 

 

 

  로이와 아가사의 이야기가 아가사의 마음속에서 벌어진 망상인지, 아니면 한 육체가 두 가지 인격에게 공유 당하며 벌어진 일들인지 해명해주기를 기다렸지만 내가 <아가사>를 만만하게 봤다. 예전에 혼자 공중화장실에 갔을 때 휴지가 없었던 적이 있다. 화장실엔 아무도 없어서 나는 이십 분을 오열하며 기다렸는데, 어느 아가씨가 내 울음소리를 듣고 칸 아래로 휴지를 건넸었다. 그 때 나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었다. 나는 <아가사>에게서 그러한 선행을 원했지만, <아가사>는 애타는 내 목소리를 듣고도 볼일 보고 손 씻고 나가버렸다. 배신자 같으니라고.

 

  아쉬움에 허리를 비틀다가 옆 좌석에 앉은 관객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 가까워서 사랑에 빠질 뻔했다. 좌석 간격이 넓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사랑에 빠지고 싶진 않다! 

 

  극 중 아가사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이후로 ‘미궁 속의 티타임’이라는 추리소설을 썼다. 추리소설의 주인공은 극 중 주인공이기도 한 레이몬드 애쉬튼이다. 미궁 속의 티타임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는 스토리인 만큼 극에서 레이몬드의 역할도 아주 기대했었다. 처음 등장할 때 주인공처럼 맨 처음 등장했고, 실제로 주인공은 맞는데 왜인지 그 주인공이 자기 자리를 잃어버렸다. 아가사 외부에서 관객들에게 등장인물의 죄를 고발해야 하는 꼬마탐정이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 아가사의 미궁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우리의 꼬마탐정인 레이몬드가 아가사의 미궁 안을 헤맬 때, 레이몬드를 기다리다 못한 로이가 아가사를 밀어 레이몬드 앞에 던져버렸다. 이래서 어린 애한테 중요한 일을 맡기지 말라는 거다. 어른 레이몬드와 아가사가 열심히 상을 차리고 수저 젓가락까지 놨더니 옆에서 구경하던 열세 살 레이몬드가 코딱지를 파다가 코를 잘못 찔러서 상에 대고 재채기를 한 기분이었다. 얘는 엉덩이 한 대 세게 맞아야 해!

 

  아가사의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따라가고 나에게 남은 결말은 그 내용과는 달리 너무 허무하다. 세상은 너무나 어둡고 우리는 힘이 없지만 내 글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은 서서히 변한다는 아가사의 생각은 잘 알겠다. 하지만 마지막 넘버인 ‘두려움이란 건’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아가사의 이런 생각은 지금껏 내가 앞서 본 공연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인간의 위선에 대해 이야기하던 극이 사람들을 일깨우는 계몽의식으로 결말을 맺어버린 것이다. 이건 여담인데 우리 아버지는 내가 커다란 포부를 가지고 시작한 일을 엉성하게 끝맺는 걸 보고 용두사미라고 했었다.

 

  아가사는 전체적으로 몇 가지를 제외하면 아주 훌륭한 공연이었다. 대본은 엄청난 몰입도를 자랑했고 뛰어난 연기력의 배우들은 그 몰입을 더더욱 증폭시켰다. 조명 또한 화려하진 않았지만 극의 분위기에 딱 맞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조금만 허리를 비틀면 옆 사람과 10센티 간격을 둔 채 눈이 마주쳐 사랑에 빠질 좋을 기회를 만들어주는 객석과 배우들의 등퇴장과 함께 코 푸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백스테이지, 기껏 1층 맨 앞 정중앙 잡아놨더니 나중에 2층 2열로 봤을 때 더 잘 보여서 나를 배신감에 휩싸이게 한 무대만 제외하면 정말 훌륭한 공연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아가사가 내년에도 공연을 올린다면 미리미리 다른 공연장을 예약해놓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내 통장은 <아가사>를 향해 활짝 열릴 것이다. 통장이 텅장.

 


글. 김다영 리뷰어(fpdhsid@gmail.com)

사진. ⓒ 아시아 브릿지